이번 이야기는 닐스 보어가 원자 모형을 발표한 이후를 소개합니다.
원자란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존재로 간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보어의 원자 모형은 정해진 궤도에서만 전자가 돌며 에너지를 흡수하면 높은 궤도로 올라가며 에너지를 방출하며 낮은 궤도로 내려오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원자 모형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진동수와 세기 뿐입니다.
그렇다면 원자 모형도 이 두가지를 설명해야 되지 않을까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기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보어의 원자모형에서 관찰되지 않는 전자의 궤도를 제거합니다.
행렬수학은 양자역학을 기술하는데 적합한 언어임이 증명되었습니다.
행렬에서 앞과 뒤를 바꿔 곱하면 완전히 다른 값이 되는 것처럼 하이젠베르크는 원자의 위치와 빠르기는 행렬처럼 순서가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원자 안에서 전자의 진동수와 세기를 알아낼 수 있는 행렬역학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계산이 복잡하고 난해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에르빈 슈뢰딩거가 파동방정식을 발표합니다.
계산한 과정은 반대인데 그 결과는 하이젠베르크와 같았습니다.
또한, 슈뢰딩거는 하이델베르크가 보이지 않는다고 없애버린 전자의 궤도를 물질파를 이용해 다시 살려 놓습니다.
그러나 "왜 전자가 궤도를 뛰어넘는가?"라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합니다.

결국, 슈뢰딩거의 생각이 옳지 않다는 증거가 나왔습니다.
슈뢰딩거가 묘사했던 파동은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슈뢰딩거의 파동은 하나의 공간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입자가 늘어나면 그 공간에 더이상 적용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하이젠베르크의 스승인 막스 보른이 밝혀냅니다.
보른은 일명 확률해석이라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입자 하나하나가 특정 공간에 있다가 확률에 따라 교체된다고 확신했습니다.
전자가 어떤 공간에 확률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일상에서 확률은 감각적으로 경험됩니다.

그런데 전자의 위치를 확률적으로 알 수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물론 우리 세계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양자역학의 대가 파인만은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구멍이 두 개 뚫린 슬릿에 광자를 통과시키는 실험을 해봅니다. 광자와 전자는 이중슬릿에서 똑같이 반응합니다.

하나씩 쏘면 파동의 성질을 가질 때 나타나는 파형이 나타납니다.

이중 슬릿을 통과한 전자는 벽 어디에서나 발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가운데 있는 지점에서 발견될 활률이 가장 높습니다.

이 지점에서 전자가 발견되면 이 때의 확률은 1이되며 다른 지역의 물질파들은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중슬릿 실험을 관측 장치를 달면 이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전자가 두 슬릿 중 하나를 통과했다고 알아채는 순간 슬릿에는 파동의 형태가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파동의 물질인 전자는 관측 전에는 여기저기에 존재합니다. 관측을 하게 되면 파동인 전자가 갑자기 수축해 입자로 보입니다.

슈뢰딩거는 이런 현상을 보고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알려진 역설을 제안합니다.

아인슈타인도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원자란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럼 현실에서 원자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빛을 비춰서 보면 됩니다.

원자 안에 파장이 긴 빛을 비추면 움직임은 빠르지 않아 잡을 수 있으나 위치가 희미하여 보이지 않습니다.

파장이 짧은 빛을 비추면 전자는 보이지만 너무 빠르게 움직입니다. 전자의 위치는 알 수 있지만 운동성은 측정이 안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입니다.

즉, 위치와 운동량을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 원리가 양자의 세계를 열어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보어는 자신의 이론인 상보성의 원리를 위에 넣고 싶어했습니다.

상보성 원리는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려고 하면 전자가 너무 빨리 움직이니 전자의 위치를 측정할 땐 운동성은 배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둘의 논쟁은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전 세상에선 모든 것이 예측 가능했습니다.

이제 세상은 불확정성이 가득한 모호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세계에 사는 우리는 결코 그 세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치열한 논쟁 끝에 우리 인간이 얻은 답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관점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의 비판에 대한 답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양자역학은 더욱 발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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